‘기’란 무엇인가요?

“기가 약하십니다.” “기가 울체되셨습니다.” 한의학 치료를 받아본 분들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은 저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지금은 의도적으로 잘 쓰지 않고 있지만, 저도 임상을 막 시작했을 무렵에는 환자들에게 많이 이야기했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런 용어를 피하기 시작한 이유는, 필연적으로 ‘그렇다면 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뒤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기는 에너지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게 답하기 힘든 문제입니다.

황제내경과 ‘기’ — 아직도 완전히 합의되지 않은 개념

한의학의 고전인 ‘황제내경’에는 한정된 기의 개념만 274개가 쓰이고 있습니다. 한의사들 사이에서도 ‘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뜨거운 주제입니다. 짧은 진료 시간 동안 환자들과 나누기에는 너무 무겁고 불필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제가 쓰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한의사분들은 여전히 많이 쓰고 있고, 대중 매체를 통해서도 많이 알려진 개념이라 한번쯤은 간략하게 쉬운 글로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저와 다르게 해석하는 한의사들도 있겠지만, 큰 틀에서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으리라 믿어봅니다.

기란 무엇인가 — 진단 용어로서의 ‘기’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기’는 자연현상과 생명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개념으로 쓰여왔습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그 개념들을 짚어가는 것은 이 글을 쓰는 의도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대 한의학이 인체 생명 현상을 설명하는 데 어떤 개념으로서 ‘기’를 사용하는지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진단의 용어로서 ‘기’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한의학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기’에 대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가 약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기가 울체되어 있다’입니다.

기가 약하다 — 대사 기능의 저하

‘기가 약하다’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신체 대사 기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신 음식물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겨 기운이 없고 피곤한 상태를 말합니다. 혈압과 맥박수가 떨어져 있기 쉽고, 체온 역시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소리에 힘이 없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고 땀이 쉽게 납니다.

임상적으로 가장 중요한 증상은 ‘식욕 없음’입니다.

대사가 저하되면 기본적으로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임상에서 환자가 피곤을 호소하면 저는 제일 먼저 ‘배가 고픈지’를 묻습니다.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배가 많이 고프다면 대사 저하의 문제가 아닌 경우가 많고, 다른 원인을 찾아내야 합니다. 한의사가 “기가 약하십니다”라고 말했다면, “내 대사 기능이 저하됐다는 얘기구나”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때 쓰는 대표적인 약재가 그 유명한 인삼(Ginseng)입니다. 침자리는 족삼리(ST36)를 가장 많이 쓰는데, 배가 고프기 시작하면 치료가 잘 진행되고 있구나 여기면 됩니다.

기가 울체되어 있다 — 자율신경계의 불균형

‘기가 울체되어 있다’라는 말은 스트레스로 인해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으로 이루어진 자율신경계의 균형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입이 마르고,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잠에 문제가 생깁니다. 소화불량과 변비가 따라오고, 성기능 장애가 생기기도 합니다.

한의학은 초기 스트레스 반응 상태와, 자율신경계의 불균형이 오래도록 지속되면서 나타나는 염증 및 부종의 상태를 구분해서 치료하고 있습니다. 염증 상태를 나타내는 개념에는 주로 ‘화(火) 혹은 열(熱)’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고, 부종은 ‘습(濕) 혹은 담(痰)’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기가 울체되어 있다”라는 말을 들으면 당황하지 마시고, “내가 스트레스가 심하구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때 쓰는 대표적인 약재는 시호(Chai Hu), 향부(Xiang Fu) 등이 있고, 침자리는 태충(LR3), 양릉천(GB34) 등이 많이 쓰입니다.

한눈에 보기

진단 용어 현대적 해석 주요 증상 대표 치료
기가 약하다 대사 기능 저하 피곤함, 식욕 없음, 낮은 혈압, 낮은 체온 약재: 인삼
침자리: 족삼리(ST36)
기가 울체되어 있다 자율신경계 불균형(스트레스) 가슴 답답함, 두근거림, 불면, 소화불량 약재: 시호, 향부
침자리: 태충(LR3), 양릉천(GB34)

정리하며

‘기(氣)’라는 말은 추상적이거나 신비롭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임상에서 그 의미는 구체적이고 명확합니다. 다음에 한의사에게서 “기가 약하다” 혹은 “기가 울체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면, 이제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치료 방향에 중요한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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